흑사병은 역사상 가장 치명스런 질병의 하나로 페스트 균 Yersinia pestis이라는 세균이 일으킨 것으로 널리 믿었으나 최근 다른 몇몇 요인에 의해 다른 질병들이 흑사병의 원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연대기를 보면 그 특징은 임파절의 종창으로 19세기 후반의 아시아 선 페스트와 같다. 20세기 초 과학자와 역사가들은 흑사병이 곰쥐에 기생하는 벼룩과 페스트 균 Yersinia pestis이 일으킨 동일한 질병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최근 일부 과학자와 역사들이 의심한다. 질병이 퍼진 사료를 해석한 일부 연구자는 출혈열의 일종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흑사병의 임상 형태에 대한 가장 충실한 기록은 선 腺 페스트와 더 맞는다.
이 역병이 어디서 온 건지 학자 사이에 말이 많다. 어떤 사가들은 중국이나 중앙 아시아로 보는데 마멋의 허파에서 벼룩이나 쥐 등으로 옮겨지다 인간까지 걸린 것으로 본다. 1320년대 후반이나 1330년대에 그리고 그 뒤 몇년 간 상인과 병사들이 비단길을 따라 전파하고 1346년 유럽 동남부의 크림 반도까지 퍼졌다고 본다. 다른 학자들은 역병이 그곳의 풍토병이라 본다. 둘 다 크림 반도에서 서 유럽과 북아프리카로 1340년대에 전염된 것이다. 전 세계에 걸친 사망 추정치는 7천 5백만명, 그 중 유럽에서 약 2천 5백만에서 5백만명이 죽었다.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0-60%가 죽었다 본다. 세계 인구가 4억 5천에서 1400년에는 3억 5천에서 3억 7천 5백만으로 감소했다 추정한다.
이 역병은 1700년대까지 매 세대마다 다양한 독성과 사망율로 돌아왔다 본다. 1603년의 재 유행에서, 38,000명의 런던 시민을 죽였다. 다른 이름난 17세기 유행은 1629-1631이 이탈리아 역병과 스페인 세비야의 대 역병(1647-1652), 오스트리아 빈의 대 역병(1679)이다. 이 질병의 정체를 두고 논쟁이 있지만 1720-1722년의 마르세이유 대 역병, 동유럽을 강타한 1738년 대 역병, 1771년의 모스크바 역병 이후 19세기에 유럽에서 사라진 것 같다.
14 세기 흑사병이 맹위를 떨쳐 유럽 인구가 크나큰 영향을 받고 사회 구조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왔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 큰 충격을 줘서 유대 인, 외국인, 거지, 나환자 등 소수 그룹을 널리 박해했다. 매일 생존이 위태롭자 병든 분위기가 넘치고 순간을 위해 살았다고 지오반니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에서 묘사했다.
이름의 유래
중세 인은 14세기 천재지변을 "대 페스트 the Great Pestilence"나 "대 역병 the Great Plague"으로 불렀다. 역병 유행 기의 저술가들은 이 사건을 "대 사망 大死亡 the Great Mortality"라 썼다. '흑사병'이란 용어는 1833년 나타났다. 이 역병이 끝 무렵에 피부가 피하출혈로 까맣게 바뀌는 걸 보고 흑사병이란 이름이 비롯됐다고 널리 믿는다. 그러나 그보다 '시무룩한', '가여운', '무시무시한' 같은 뜻으로 '검은 흑'을 썼음직하다.
역병의 이동 경로
흑사병은 유럽의 주요 해상/육상 무역로를 따라 빠르게 퍼졌다. 이 역병은 흔히 중앙아시아 설치류( 주로 마멋의 일종인 보박 bobac) 몸속에 사는 페스트 균Yersinia pestis이 일으킨다고 널리 믿지만 14세기 역병이 어디서 비롯했는지 모두 밝혀진 게 아니다. 인기 학설은 중앙 아시아 초원 기원설이다(인도 북부 기원설도 있지만) Michael W. Dols 같은 역사가는 지중해의 역병 관련 증거와 특히 유스니아누스 역병을 볼 때 아프리카에서 비롯돼서 중앙 아시아로 퍼지고 거기 설치류 무리에 전파됐다 본다.
몽골 군과 무역상이 '몽골의 평화 Pax Moglica' 시기에 통행이 자유로워진 비단길을 통해 중앙 아시아에서 동서 양쪽으로 퍼뜨렸다. 유럽에 처음 나타난 건 1347년 크림 반도의 무역 도시 카파 Caffa다. 도시를 오래 포위한 몽골 군은 역병에 시달렸는데 도시에 병이 퍼지도록 병으로 죽은 시체들을 던져넣었다.
배를 탄 제노아 상인들이 시칠리아와 남 유럽으로 병을 옮기고 거기서부터 퍼져나갔다. 이 가설이 맞든 틀리든 전쟁, 굶주림, 날씨 등 여러가지 선행 조건들이 흑사병이 깊어지는 데 이바지했다. 중국에서 13세기에 몽골의 정복 전쟁으로 농업과 상업이 붕괴하여서 광범위한 기아를 초래했다. 그 인구가 대략 1억 2천만 명에서 6천만 명으로 급감했다. 14세기의 역병으로 중국 전 인구의 1/3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럽에서 중세의 온난기 the Medieval Warm Period 가 13세기 말 무렵에 끝나자 더 혹독한 겨울이 오고 수확량은 줄었다. 1315년에서 1317년 사이 대기근 the Great Famine으로 알려진 파멸적 기근이 북서 유럽의 많은 지역을 강타했다. 이 기근은 앞선 세기의 대규모 인구 증가의 결과인데 이로써 14세기 초부터 인구는 농지와 농부의 생산량이 지탱할 수 있는 숫자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북 유럽에서 무거운 쟁기의 사용, 3포제 the three-field system 같은 새로운 기술적 개선이 도입되지만 북 유럽의 토양이 척박하고 진흙 같아서 지중해 지방에서만큼 효과적이지 못했다. 역병이 창궐하기 이전 한 세기 동안 식량 부족과 하늘로 치솟는 물가가 일상화됐다. 밀, 귀리, 건초, 가축이 모두 모자라고 이러한 결핍이 굶주림과 영양 불량으로 이어졌다. 이 결과, 면역 체계가 약화되어서 질병에 대한 인체의 저항력이 떨어졌다.
유럽 경제가 악순환에 빠지는데 굶주림과 만성적이고 저 수준의 소모성 질환이 노동자의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그 결과 산출량이 줄고 곡물 가격을 올렸다. 이 상황은 영국의 에드워드 3세나 프랑스의 필립 6세 같은 토지 소유자와 군주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자신들의 생활 수준이 떨어질까 두려워서 세금과 소작료를 올리는 바람에 더욱 나빠졌다. 생활 수준이 심각하게 저하하자 식사는 더욱 제한되고 유럽 인들은 전체적으로 더욱 많은 건강 문제를 겪게 되었다.
1314 년 봄 폭우가 시작되고 몇년 간 춥고 축축한 겨울이 이어졌다. 이미 수확량이 감소한 상태이던 북 유럽은 더욱 고통 받고 7년 간 기근이 계속됐다. 이 대기근은 유럽 역사 상 가장 혹독하였는데 최소 10 %의 인구가 감소했다. 나무의 나이테 분석에 따르면 이 기간에 기상 악화뿐 아니라 건축의 중단도 일어났다.
다가오는 재난을 미리 알려주는 사건 즉 일종의 장티푸스성 유행병이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서 나타났다. 인구가 집중된 도시 지역 특히 이프르 Ypres에서 수천, 수만 명이 죽었다. 1318년 기원을 알 수 없는, 때때로 탄저병 anthrax으로 알려진 선 페스트 pestilence의 일종이 유럽의 동물들 특히 양과 소에게 나타나서 식량 공급을 더욱 줄이고 농부들의 수입을 떨어뜨렸다.
선 폐스트 감염의 원인들
이 세균은 벼룩이 옮기며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원인으로 널리 믿었다.
흑사병을 일으킬 수 있는 여러가지 원인이 존재한다. 선페스트 유행 설이 가장 유력하다. 토양과 설치류 그리고 인간의 체외 기생충 [진드기 등] 속에서의 페스트 균의 생태 및 유행은 Michel Drancourt가 제한적, 산발적, 그리고 대규모의 유행을 모델링하면서 리뷰하고 요약했다.
페스트 균의 충분한 전염은 벼룩이 물어서만 가능하다고 널리 믿어져 왔다. 감연된 숙주에서 며칠간 피를 빨아먹은 뒤 페스트 균의 복제로 인해서 벼룩의 중장 midgut이 폐색된다. 이 폐색으로 벼룩이 굶주리고 더욱 공격적으로 피를 빨아먹고 자꾸 토해서 장폐색을 해소하려 한다. 따라서 수천의 전염성 세균이 흡혈 부위로 쏟아지고 숙주는 감염된다.
그러나 프레리 독에서 관찰되는 동물 간 유행병 epizootic plague의 모델링이 시사하는 것은, 감염된 사체 carcass와 같은 간헐적 감염원이 자연계의 질병에서 관찰된 동물 간 전염 현상에 대한 더욱 그럴듯한 설명이라는 것이다.
유럽에서 기원한 전염병의 역학에 대한 한 가지 가설은, 질병 유발 벼룩 기생 설치류 집단을 결국 다른 종이 대체했다는 것이다. 무역에 의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검은 쥐가 도입되지만 그 뒤 더 대형의 갈색 쥐가 유럽 전역에서 대체하고 계승했다.
갈색 쥐의 상이한 생태로 말미암아 병원체 운반 벼룩을 인간에게 파멸적 규모로 전파하는 경향은 없었다. 쥐 생태의 역동적인 복잡성, 이들 병원소 reservoir의 집단 면역성, 인간 거주 환경과의 상호작용, 벼룩이 간여하거나 간여하지 않은 2차 감염 경로, 인간 집단의 면역성 그리고 이들 개별 요소의 변화가 수세기 동안 이어지다가 설명할 수 없능 이유로 사라진 페스트의 발생, 전파, 재발을 설명해줄지도 모르겠다.
증후와 증상
세가지 형태의 역병이 일련의 증후와 증상을 감염자에게 일으킨다. 패혈성 역병은 '혈액 중독'의 형태다. 폐렴성 역병은 공기-전파 역병으로서 다른 부위보다 먼저 폐를 공격한다. 선 페스트의 고전적 증후는 사타구니, 목, 겨드랑이에 나타나는 임파선 종창으로서 고름과 피가 나왔다. 희생자 대부분은 감염 4에서 7일 안에 죽었다. 이 역병이 유럽에 이르러서 먼저 항구 도시를 강타하고서 바닷길과 육로의 무역로를 따랐다.
선 페스트는 흑사병 시기에 가장 널리 나타났다. 사망률이 30에서 75%고 증상은 38-41도의 발열, 두통, 관절통, 메스꺼림, 구토, 전신 쇠약감을 포함한다. 선페스트에 노출되고서 사망자 5명 중 4명은 8일 안에 죽었다.
폐렴성 역병은 흑사병 시기에 두번째로 많이 보였다. 사망률이 90에서 95%였다. 증상으로 발열, 기침, 피가래를 포함했다. 이 질병이 진행하면 가래가 자유롭게 날리고 밝은 적색이 됐다.
패 혈성 역병은 세가지 중 가장 적게 나타난 형태로 사망률은 100%에 가까웠다. 증상은 고열과 보라색 피부 얼룩이다. David Herihy가 이 역병의 다른 잠재 증후로서 주근깨 같은 반점과 발진을 확인했다. 통상 'lenticular'로 불리우는 증후를 언급한 이탈리아, Viterbo의 자료에 따르면, 이 'lenticular'는 이탈리아 어로 주근깨를 뜻하는 'lentiggini'를 닮았다. 이들은 임파선 종창이 부푼 것이라기보다 인체의 큰 부위를 덮는 어두운 반점이나 농포에 가깝다.
맬서스적 위기
게다가 많은 사가들은 흑사병의 원인을 놓고 다른 이론을 사회, 농경 때로는 경제 문제에 걸쳐서 펼쳐왔다. 종종 맬서스의 한계로 알려진 이 용어는 학자가 역사 상의 특정 비극들을 표현하고/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쓴다.
1798년 <인구 원리에 대한 에세이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에서 토머스 맬서스 Thomas Malthus 는 인류가 결국 번식을 너무해서 식량 공급의 한계점을 넘어선다 주장했다. 식량 공급 한계점에 도달하면 일종의 '청산 reckoning'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흑사병이 이런 청산 작업의 하나로 보인다면 그것은 실제로 외부의 예측 불가한 요소이므로 맬서스 이론에 들어맞지 않았다.
그의 책 <흑사병과 서구의 탈바꿈 The Black Death and the Transformation of the West>에서 David Herlihy는 인구와 자원을 제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위기로서 흑사병을 보는 시각을 탐구했다. <흑사병; 역사의 전환점인가? In the book The Black Death; A Turning Point in History? (ed. William M. Bowsky) >에서 "흑사병을 중세 말기 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암시하는 시각은 현재 도전 받고 있다. 신 맬서스주의 경제학을 바탕으로 주장하면서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흑사병을 인구 과다의 유럽에 필수적이고 장기적 구제수단으로 재조명하고 있다."라고 썼다. Herlihy는 맬서스 위기에 맞서는 이런 주장을 다음과 같은 주장을 앞세워서 검증한다. "만약 흑사병이 과잉 인구에 대한 반응이라면 수십년 앞서 왔어야 했다." 흑사병 창궐 이전의 인구 증가 상황 때문이다.
Herlihy 는 또한 다른 생물학적 요소들을 제기한다. 인구 추이에 미치는 기아의 역할 역시 문제가 많다는 주장으로써 흑사병을 일종의 청산 작업으로 보는 시각을 반박한다. 흑사병에 앞선 많은 기아들, 심지어 1314-1317년의 대기근도 인구 수준에 어떤 뚜렷한 감소도 초래하지 않았다. "중세의 사례으로부터 맬서스의 위기가 아니라 어떤 진퇴양난의 상황을 볼 수 있다. 상당 기간에 걸쳐서 안정적 수준으로 매우 대규모의 인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라고 시작하면서 Herilhy는 이 문제를 결론짓고 이 현상에 대해 흑사병 이전의 유럽을 묘사하려면 위기라기보다 일종의 교착상태라고 봐야 한다고 썼다.
결과
사망자 수는 지역과 소스에 따라서 즉 새로운 연구와 발견이 빛을 보면서 매우 다르다. 14세기에 7천5백만에서 2억명을 죽였다 추정한다. 2007년 중세 역사가 Philip Daileader 에 따르면: "최근 연구 경향은 4년 간에 걸쳐서 유럽 인구의 45%에서 50%가 죽었다는 데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지역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유럽의 지중해와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 스페인에서 흑사병이 4년간 창궐하여서 아마도 인구의 75%에서 80%에 가까운 것 같다. 독일과 영국은 아마 20%에 가까울 것이다."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의 중동 지방에 대한 최선의 추정치는 사망율이 1/3이라는 것이다. 흑사병으로 이집트 인구의 40%가 죽었다. 유럽의 정부들은 이 위기에 처하여서 어떤 뚜렷한 대응도 내놓지 못했다. 흑사병의 원인과 전파 경로를 몰라서다. 1348년 흑사병이 너무 급속하게 퍼져서 의사나 정부 당국에서 그 기원에 대해서 어떤 대책을 세울 겨를도 없이 유럽 인구 1/3이 재앙을 맞았다. 인구 밀집 도시에서 인구 절반이 죽는 것도 드문게 아니었다. 고립 지역의 유럽인은 덜 감염되었다. 수도사들과 사제는 특히 심하게 타격받았으니 그들이 흑사병 희생자들을 돌봐서다. 14세기 치료자는 그 원인을 설명할 길이 없어서 유럽인들이 점성술적 힘, 지진 그리고 유태인의 우물 독 살포를 흑사병 발생의 가능한 원인으로 봤다. 14세기의 아무도 쥐를 잡는 게 흑사병을 막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오로지 신의 분노만이 그런 끔찍한 광경을 초래할 수 있다 믿기 시작했다. 유태인 거주지를 많이 공격했다. 1349년 8월 '마인츠'와 '콜롱'의 유태인 거주지가 전멸했다. 앞서 같은 해 2월에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2천명의 유태 인을 기독교 인들이 살해했다.
이런 운동은 흑사병에 대한 교회의 반응에 일반적인 환멸이 생긴 뒤 널리 퍼졌다.
정부 당국을 보면 대부분의 왕국은 흑사병 대책으로써 식료품 수입을 끊고 암시장의 투기꾼을 벌주고 곡물 가격을 통제하고 대규모 어업을 불법화했다. 기껏해야 이들 대책은 집행 불능이고 최악의 경우, 대륙 전체에 걸친 하강 곡선에 이바지했다. [이러한 조처로] 가장 타격을 입은 영국 같은 나라는 곡물을 수입할 수 없었다. 그 원인은 프랑스의 금지 조치와 더불어 다른 곡물 생산자들도 노동력 부족으로 농사를 망쳐서다. 선적된 식량도 결국 해적이나 도적이 강탈하여서 암시장에 내다 팔았다. 게다가 규모가 큰 국가 중 많은 수가 특히 영국과 스코틀랜드가 전쟁을 계속해서 많은 자산을 소모하고 인플레이션을 촉진했다. 1337년 흑사병의 첫번째 창궐의 전야에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에 돌입한다. 영양실조, 빈곤, 질병과 굶주림이 전쟁으로 배증하고 치솟는 물가와 다른 경제 상황이 14세기 중반의 유럽을 비극으로 내몰았다.
앞서 흑사병의 사회문화적 영향에 대한 참고자료에서 언급했다시피 다시 타오르는 종교적 열정과 광신이 흑사병의 여명기에 만개했다. 일부 기독교도들은 유태 인, 탁발 수도사 friars, 외국인, 거지, 순례자, 나환자 그리고 로마 Roma를 타겟으로 삼았는데 이들 그룹이 이 재앙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나환자 및 기타 피부병 즉 여드름, 건선 등의 환자도 전 유럽에서 추방되고 절멸됐다. 문화와 생활 양식의 차이도 박해로 이어졌다. 유태 인이 일부러 우물에 독을 타서 흑사병을 일으켰다고 의심받았는데 종교적으로 청결하고 공동 우물을 쓰지 않아서다. 기독교 폭도들이 전 유럽에서 유태인 거주지를 공격했다. 1351년까지 60 곳의 주요 및 150 곳의 소규모 유태인 거주지가 파괴되고 350 건의 개별적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재발
영국에서 인구 통계 수치가 없지만 역사가들은 흑사병 이전 인구를 1300년 당시 최대 7백만에서 적게는 4백만로 추정하고 흑사병 이후 인구가 2백만으로 대폭 감소한 것으로 생각한다.1350년 말 무렵 흑사병은 잠잠해지지만 그후 수백년 간 결코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1361-62년, 1369년, 1379-83년, 1389-93년 그리고 15 세기 전반부 내내 추가로 유행했다. 흑사병으로 종종 1 년 안에 지역 인구의 10%가 죽었다. 최악의 유행인 경우, 1579년의 노리치 Norwich나 1636년의 뉴캐슬에서 30 혹은 40%가 죽었다. 튜더와 스튜어트 왕조 시절의 영국에서 가장 광범위한 발생들은 모두 독일 및 저지대 국가들 [네덜란드 등]의 흑사병 시기와 일치하는데 1498년, 1535년, 1543년, 1563년, 1589년, 1603년, 1625년, 그리고 1636년에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4세기에서 17세기까지 흑사병은 반복적으로 유럽과 지중해에 출몰했다. 비록 선 페스트는 고립된 케이스로 현재도 발병하고 있지만 1665-1666년의 런던 대역병을 마지막 대 발생의 하나로 널리 받아들인다.
1466 년 파리에서 4만 명이 죽었다. 1570년 모스크바와 그 인근에서 20만 명이 죽었다. 1575-1577년의 흑사병으로 베네치아에서 약 5만 명이 희생됐다. 1625년 35,417명의 런던 시민이 흑사병으로 죽었다. 1634년 흑사병 발생으로 1만 5천의 뮌헨 거주자가 죽었다. 중부 유럽의 후기 발병들 가운데 1629-1631의 이탈리아 역병은 30년 전쟁에 따른 군대 이동과 연관된다. 1679년엔 비엔나 대 역병이 있었다. 1654년에서 1656년에 흑사병으로 20만 명의 모스크바 사람이 죽었다.
1348에서 1350년에 60% 이상의 노르웨이 인구가 죽었다. 오슬로에서 최후의 발병은 1654년이다. 1656년 나폴리 거주자 30만 명 가운데 약 절반이 흑사병으로 죽었다. 암스테르담을 1663-1664년에 휩쓸어서 사망자가 5만 명에 달했다.
17세기 전반부에 흑사병으로 이탈리아 인구의 1백 73만 명 즉 총 인구의 약 14%가 죽었다. 1백 25만 명 이상이 극단적 발병으로 17세기 스페인에서 죽었다. 30년 전쟁 동안 8백만 명 이상의 독일인이 선 페스트와 티푸스 열로 사라졌다. 스웨덴 대 러시아 및 그 동맹국들 간의 북방 대전쟁 the Great Northern War에 이은 유행병으로 그 지역 인구의 1/3이 죽었다. 1710년의 유행으로 헬싱키 인구의 2/3가 죽었다. 1710에서 1711년 사이의 역병 발발로 스톡홀름 인구 1/3이 죽었다. 유럽 최후의 대규모 유행은 1720년 마르세이유에서다.
흑사병은 이슬람 권의 많은 지역을 휩쓸었다. 19세기까지 유행이 반복됐다. 19 세기 중반 3차 대유행이 중국에서 시작돼서 인류가 사는 모든 대륙으로 퍼지고 인도에서만 1천만 명이 죽었다. 이 역병은 약제에 내성을 보일 수 있었고 건강을 위협하는 주요 문제로 떠올랐다. 투여 항생제 중 많은 종류에 내성을 보이는 것은 지금까지 마다가스카르에서 오직 한 사례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1944년부터 1993년까지 미국에서 362건의 인체 감염이 보고됐다. 대략 90%가 서부 지역 4개 주에서 일어났다. 1995년에 서부 9개 주에서 역병이 확인됐다.
당시 문화에 미친 영향
흑사병은 그걸 경험한 모든 세대에 걸쳐서 예술과 문학을 지배했다. 역사가에 유용한, 흑사병에 대한 가장 유용한 문학적 묘사 가운데 많은 수가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에서 나온다. 당시의 기록만이 그러한 규모의 재앙 아래 살아간 공포의 느낌을 접할 유일한 길이 되곤 한다. 이들 연대기 작가 중 몇몇은 유명한 작가, 철학자, 통치자들로서 보카치오나 페트라르카 같은 사람이다. 그들의 저작을 그러나 유럽 인구 대다수는 접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서 페트라르카의 작품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부유한 귀족과 상인이 주로 읽었다. 그는 탁월한 묘사로 수백통의 서신과 구어체 시를 쓰고 후세에게, 궁정 연애를 개작해서 번역한 작품 하나를 남겼다. 그러나 상류 사교계를 묘사한 서정적 스타일의 작품을 쓰던 어느 음유시인이 1348년에 활동하고 있었다. Peire Lunel de Montech는 툴루즈 Toulouse에서 흑사병이 극성인 시기에 슬픔에 찬 풍자시 sirventes 인 "Meravilhar no·s devo pas las gens" 를 지었다.
"그들은 수백 명씩 밤이나 낮이나 죽어서 모두 ... 도랑 등에 던져져 흙으로 덮였다. 그 도랑이 가득 차자마자 더욱 깊이 파야 했다. 그리고 나, Agnolo di Tura는 내 자신의 손으로 내 다섯 아이를 묻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이 죽어서 모두들 세상의 종말이라고 믿었다."
— 시에나의 역병 The Plague in Siena: 어느 이탈리아 연대기
"얼마나 많은 다양한 사내들이, 얼마나 많은 숙녀들이, 그들의 친척과 아침 식사를 했다가 같은 날 저녁에 그들의 조상을 저승에서 만나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는가! 사람들의 상태란 쳐다보기에 가련했다. 매일 수천 명이 병에 걸려서 간호 받지 못하고 도움도 못 받고 죽어갔다. 다수가 길바닥에서 죽고 다른 이들은 집에서 죽어서 썩은 시체 냄새가 죽음을 알렸다. 신성한 교회 묘지도 산더미 같은 시체에 충분하지 못하여서 시체들은 수백 구씩 넓은 참호들마다 쌓인 게 배에 싣는 화물 같았고 흙으로 얇게 덮을 뿐이었다.
—지오반니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
http://podor.egloos.com/1457637
출처
원문링크 : 흑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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