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 간장 <하울링>막장시선 일러스트
홈쇼핑을 볼 때마다 지독하게 빠져든다.
뜬금없는 상품이 나와도 쇼호스트가 입을 열면 꼭 필요한 물건 같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물건을 이제야 찾게 됐는데,
감사하게도 부족한 나의 경제 사정으로도
소유할 수 있게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한다.
때를 놓치지 않고 '득템' 한다.
이제 한동안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결제를 마치고 택배를 받을 때쯤이면 최면은 풀려간다.
한두 번 쓰다 쓰레기가 되어 나뒹구는 꼴을 보다 못해
갖다 버리게 될 즈음, 깔끔하게 현실로 돌아온다.
남은 무이자 할부 기간 동안은 TV를 켜지 말아야지, 잠깐 동안 다짐해 보지만
결국 다시 TV를 켜고 빠져든다. 이 악순환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들이 쇼호스트다.
그들이야말로 매스미디어 시대의 영매들임이 분명하다. 자신들이 먼저
'지름신'을 영접하지 않고서는 저렇게 사람을 홀릴 수가 없다.
당장 사서 내 것으로 만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호들갑을 떤다.
그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멘트는 결코 특별하지도 않다.
"제가 늘 여러분께 좋은 상품을 많이 소개했지만,
이번 상품은 이제까지의 상품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라는
거짓말로 시작해서 "요즘 제 주변에서 정~ 말 좋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라는
두 번째 거짓말에 이어, 장시간 착용해도 머리가 아프지 않다는 둥,
반영구적이라 돈 주고 건전지를 살 필요가 없다는 등의 장점 나열, '1+1'의 혜택이나
이번 시즌 최다 구성의 기회라는 행사 내용을 여러 번 강조할 뿐이다.
뻔하고 조잡해서 짜증이 날 정도다. 그런데 늘 '먹힌다.' 내 옆에 붙어서 달콤하게 속삭이거나
내 손으로 제품을 만지게 하지도 않는데, TV 너머에 사는 그들은 나를 리모컨처럼 조종한다.
이성을 흔들고, 취향을 바꾸며, 필요를 만든다. 손가락을 들어 080으로 시작하는 전화 버튼을 기꺼이 누르게 한 후,
비밀 번호로 닫힌 계좌마저 열게 만든다. 그래서 묻고 싶다.
어쩌다 <하울링>은 홈쇼핑보다 매혹적이지 못한 이야기가 되었는가?
예고편만 보면 <하울링>은 수작의 풍모를 갖추었다.
가져온 소재는 신선하고 주제는 의미 있다. 야생의 피를 가졌지만
인간 가족에게 길러져 그들을 위해 죽어간 '늑대개'. 그를 통해 서로를 소외시키며
단절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단다. 참, 괜찮은 제작 의도다.
원작인 일본 소설 <얼어붙은 송곳니>를 읽은 유하 감독은 훈련된 살인을 마치기 위해
도시를 떠도는 늑대개 질풍이와 가정과 직장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은영(이나영)의 교감을
고독한 현대인들에게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말죽거리 잔혹사>(2004)부터 <비열한 거리>(2006) <쌍화점>(2008) 등
사회에서 외면당한 이들의 감성을 세심하게 잡아내 왔던 유하 감독의 차기작으로 괜찮은 선택이다.
여기에 묘한 마스크를 가진 여배우 이나영과 형사 연기의 최고봉 송강호가 동참하면서 기대가 증폭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너지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흥행성과 작품성을 보장할 것 같던 이 모든 요소들이
교통사고처럼 충돌하면서 서로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원작 소설에서 치밀하게 직조되었던 늑대개와 여형사 은영의 교감은
연달아 터지는 살인사건과 이면의 범죄 현장을 소개하느라 충분히 설명되지 못했다.
눈 몇 번 마주치고, 화재 현장에서 문 열어준 인연 정도로 살인견이 새로운 타인과 눈이 맞는다는 건,
너무 속도위반 아닙니까? 한편, 스릴러 수사극이라 하기에도 긴장감이 너무 떨어진다.
두 시간 내내 사람이 불타 죽고, 개에게 동맥이 물어뜯겨
피를 토하는 장면이 나온다 해도 긴장감이 돌지 않는다.
이나영의 꽃 같은 얼굴이 뭉개지고, 동료 경관들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소녀들이 어른들에 의해
성매매를 당하는데도, 신기하리만치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심정이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주인공과 동화되지 못한 상태로 보는 모든 어려움은 그저 영화적인 설정에 불과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제아무리 강도 높은 장면이라 해도 <추격자>(2008)나 <황해>(2010)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2010) 같은 영화에 비하면 경범죄 수준에 불과하다.
애초에 유하 감독은 늑대개를 잔혹한 그림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아닌
감성적 코드로 활용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울부짖는' '휘몰아치는' 이라는 센 뜻을 가지고도 '하울링'이라는
예쁜 어감을 가진 이 영화 제목처럼, 소재의 수위와 상관없이 <하울링>은
감성적인 스릴러 수사극의 길을 걸으려고 했다.
아쉽게도 영화의 서글픈 외침은 파장이 깊지도 넓지도 않다.
게다가 늑대개의 등장으로 나올 수 있는 시각적인 자극 역시 없었다.
밋밋하고 심심한 영화가 된 건 당연한 결과다.
가장 안타까운 건 좋은 배우들이 함께 나와 서로 충돌한다는 점이다.
이나영의 캐스팅은 개인적으로 '지못미'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미모를 가진 여배우다.
비록 30대가 되었다고는 해도 사람인지 외계인인지 헷갈릴 정도의 미모를
영화 속으로 고스란히 가져온 것에는 문제가 있다.
연기력을 떠나, 그녀의 외적인 아름다움은 바싹 말라버린
강력계 여형사 은영의 내면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이질적이었다.
아무리 영화 속에서 "요즘 강력계 형사는 비주얼로 뽑느냐?"는 대사로 정당성을 부여해도,
'강력계 형사는 예쁘면 안 되냐?'고 반문해 봐도 마찬가지.
그녀의 조각 같은 얼굴이 은영을 은영답게 하는 데 방해가 된 건 사실이다.
감독의 책임도 크다. 수시로 이나영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통에
'이나영은 예쁘다, 정말 예쁘다'는 자각을 끊임없이 일깨워주었으니 말이다.
오토바이를 몰면 CF 같고, 권총을 겨누면 만화 캐릭터 같으니 어쩌면 좋으랴. 열연을 한 이 배우에게는
'예쁜 게 죄'라는 위로를 해줄 수밖에. 송강호의 '미친 존재감'도 방해가 됐다.
'송강호가 풀리지 않은 사건의 형사를 연기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전작 <살인의 추억>(2003)의 박두만을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하울링>에서 상길(송강호)은 은영과 늑대개의 교감을 지켜보다 동화되는 최측근일 뿐이다.
작품성만 보고 기꺼이 여자 주인공을 받쳐주는 역할로 내려오신 것은 칭송받을 일이나
결과적으로 여주인공에게 가야 할 시선을 빼앗고, 성공한 전작 캐릭터를 기대하는 관객에게
만족도 주지 못했으니 이 또한 어쩌면 좋으랴.
영화는 '절제의 예술'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뷔페식당에 갔을 때 차려놓은 것 하나씩 다 집어 먹으면 도대체 뭘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영화도 근사하게 차려진 한 접시만 먹고 나오는 것이 100번 낫다. 아니면 약한 맛부터 강한 맛으로,
차가운 것에서 뜨거운 것으로, 에피타이저에서 메인 요리로 정확하게 계산되어 서비스되는 풀코스여야 한다.
홈쇼핑에서도 최다 구성은 시즌을 마감할 때나 하는 일이니까.
송원섭의 롤링 페이퍼 일러스트
<아티스트>는 흑백 무성 영화 속에서 사랑과 웃음이 숨 쉬던 시대를 되살려냈다.
흑백 무성 영화가 지배하던 시절.
불멸의 스타 조지 발렌타인(장 뒤자르댕)은 토키(유성 영화)라는 새로운 기술을 무시한다.
영화란 원래 소리 없이 창조된 것이고, 거기에 약간의 자막과 직접 연주되는
음악만 있으면 그 자체로서 완벽한 것이다. 배우의 목소리를 듣고 싶으면 연극을 보러 갈 일이지
어째서 영화를 본단 말인가? 영화는 영화, 연극은 연극이다.
하지만 세상은 어느새 변해 있었고, 관객들은 유성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앞에 줄을 섰다.
오 마이 갓. 그는 어느새 잊힌 스타가 되어가고 있었다. 84회 아카데미 시상식 5개 부문 수상으로
최고의 영화 자리에 오른 <아티스트> 이야기다.
21세기 초, 깜찍하게도 무성 영화를 흉내낸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읽기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 소박한 진정은 전 세계 관객과 통했다.
다른 영화 얘기를 해보자.
무성 영화 최고의 스타 돈 록우드(진 켈리)는 여배우 리나 라몬트(진 하겐)와 짝을 이뤄 수많은 히트작을 남겼다.
조지 발렌타인과 달리 록우드는 새로운 발성 기술에 적극적으로 적응한다.
심지어 그는 "그렇다면 뮤지컬 영화를 만들면 어때?"라는 경이적인 아이디어까지 내놓는다.
문제는 라몬트. 록우드와는 달리 라몬트는 입만 벌리면 사람들을 폭소케 만드는 목소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라몬트의 외모를 받쳐줄 목소리를 가진 신인을 물색하고,
그래서 발탁된 케이시 셀든(데비 레이놀즈)과 록우드는 곧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52년작 <사랑은 비를 타고>의 줄거리다. 이 영화도 <아티스트>와 동시대인
1927년, 유성 영화라는 새로운 기술과 맞닥뜨린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지향점은 정반대다.
<사랑은 비를 타고>를 통해 진 켈리는 당시 최첨단의 기법을 투입해 뮤지컬의 미래에 대한 낙관을 관객에게 전한다.
반대로 <아티스트>는 잊힌 시대, 새로운 물결에 함께하기를 거절했던 사람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낸다.
유성 영화의 시대에 무성 영화를 고집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지만,
컬러의 시대에 흑백 영화를 고집한 사람은 적지 않았다.
많은 작가들이 흑백 영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관객에게 전했다.
물론 컬러 시대에 살아남은 흑백 영화에서 따뜻함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의 관객이 흑백 화면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보다는 시니컬한 웃음이나 냉철하고 분석적인 시선을 느꼈다.
코언 형제 감독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2001)나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2000)이 좋은 예다.
하지만 <아티스트>는 이제는 저 먼 기억 속으로 사라진, 흑백 무성 영화 속에서
사랑과 웃음이 숨 쉬던 시대를 되살려냈다.
바로 그 시절의 정서를 담아서.
얼마 전, 옛날 영화를 즐겨 본다는 후배와 대화를 나누다 그가 생각하는 '옛날 영화'가
<백 투 더 퓨처> 시리즈라는 사실을 알고 좌절감을 느낀 적이 있다. 무성 영화는 몰라도,
그 자체로서 탄탄한 미적 완성도에 이르렀던 흑백 고전 영화의 세계는 이제 어디에 그림자를 드리워야 할까.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레베카>(1940)에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는
로렌스 올리비에의 모습을, <과거로부터>(1947)에서 창백할 정도로 희게 빛나는 제인 그리어의 미모를,
오드리 헵번과의 마지막 인사 자리에서 쓸쓸한 웃음으로 돌아서는 그레고리 펙을,
험프리 보가트에게 마지막 눈길을 준 채 남편과 비행기에 오르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뒷모습은
이제 영영 의미 없는 세계로 사라지고 말 것인가.
컬러가 나오고 3D가 나올 때마다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만, 항상 결론은 같았다.
사람들이 보길 원했던 것은 첨단 기술이 아니었다. <아티스트>가 증명해 낸 것은
<아바타>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극장에서 진정 보고자 한 것은
수천만 달러를 쏟아 부은 특수효과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 펼치는 기적 같은 순간들과 진지한 감정이었음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박훈희의 섹스 코드 <아티스트> 일러스트
사랑할 땐 무성 영화처럼....
때로는 언어가 섹스를 방해한다.
84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가장 큰 반전은 남우주연상 부문이었다.
<디센던트>의 조지 클루니냐, <머니볼>의 브래드 피트냐! 세기의 대결처럼 느껴지던
84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남우주연상이 의외의 주인공 <아티스트>의 장 뒤자르댕에게 돌아가니,
이 역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드라마틱했다. 입체 영상을 넘어서 촉각의 경험치까지 원하는
4D 플렉스 시대에 흑백 무성 영화 <아티스트>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5관왕을 차지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까 싶다. <아티스트>를 보기 전, '대사 없는 영화를 두 시간이나 보면 지루하지 않을까?'
라는 걱정이 앞섰던 것은 나뿐일까?
밤 열두 시를 훌쩍 넘긴 시간에 극장으로 향하면서 '졸면 어쩌지' 고민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기우였다. <아티스트>는 무성 영화여서 더 화면에 집중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음악 외에 소리 나는 대사가 없으니 장 뒤자르댕의 표정에 촉각을 세우게 되고,
그의 몸짓이 의미하는 바를 상상하게 됐다. 영화 후반부가 진행될 즈음에는
중간에 자막으로 흘러나오는 대사가 거슬릴 정도였다.
대사가 오히려 영화의 흐름을 깬다는 느낌이 들었달까? 최소한의 대사였는데도 말이다.
<아티스트>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 두 가지.
연인 사이에도 말보다 몸을 통한 의사소통이 더 정확할 때가 있지 않나?
섹스 중 대화는 꼭 필요한 걸까? 간혹 남자들은 말한다.
"아니,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야지.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혹은 "좋으면 좋다고 말을 해야 알지"라고. 여자도 성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시대고,
연인 사이의 성담론이 원활해야 한다는 데에는 나 역시 동의한다.
"난 애무가 좀 세게 들어오는 게 좋더라, 오늘처럼." "저번에 했던 엇각 체위, 한 번 더 할까?" 등
최고의 섹스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좀 부드럽게 해주면 더 좋을 텐데"라고 불만을 털어놓는 것도
섹스 라이프의 건강한 신호라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연인 사이의 성담론에 유성의 언어만이 유효한 걸까?
섹스 중에는 오히려 무언의 표현이 더 강렬한 것은 아닐까? '좋아'라는 말보다 허리 아래를 꼬거나,
상대의 어깨를 꽉 쥐는 몸의 언어가 더 자극적이지 않나.
섹스 중 말 많은 남자가 딱 질색이라는 A는 "막 분위기가 오르려는데 그가
'좋아?'라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좋아'라고 말하고 계속 집중하는데,
그가 또 '좋아?' 라고 묻는 거예요. 체위를 바꿀 때마다, 애무 부위를 바꿀 때마다
'좋아?'라고 묻는 통에 섹스에 집중이 안 되더라고요. 분위기 확 망쳤어요"라고 성토했다.
B는 "전 남자가 섹스 중 '거기!'라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싫더라고요.
말 대신 깊은 한숨 같은 신음 소리를 내거나, 몸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가는 등
몸짓 언어로 오르가슴을 표현할 때는 '아, 여기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열심히 하게 되는데,
남자가 '거기!'라고 콕 집어 말하면 순간적으로 딱 하기 싫어져요.
어쩐지 강요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달까"라고 말했다.
남자들의 의견은 좀 달랐다.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말은 좋지만, 다운시키는 말은 질색이라고.
남자 후배인 C와 D는 한소리로 입을 모았는데, "'거기'라는 말은 좋죠.
그런데 '거기 말고' '이렇게'라고 말하면 짜증나요.
열심히 하고 있는데 뭘 더 어쩌라는 거야?"라는 반발심이 든다는 거였다.
아마도 이들 모두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묻지 마, 보면 모르니?"라고.
때로는 언어가 섹스를 방해한다. 그 혹은 그녀와의 뜨거운 밤을 고조시키기 위해
내뱉은 말이 그날 밤 분위기에 찬물을 확 끼얹을 수도 있다는 얘기.
그러고 보면 섹스는 몸의 대화라는 명제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닌가 보다.
몸의 언어가 서로 소통하지 않을 때에 비로소 말이 필요하다.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사이가 되려면
무성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몸 언어를 잘 표현하고, 상대의 몸 언어를 잘 읽으려는 노력 말이다.
섹스 중 연인에게 필요한 것은 대화보다, <아티스트>를 볼 때처럼
눈썹의 움직임, 입술 모양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몰입의 노력이 아닐까?
출처
원문링크 : 하울링, 송강호, 아티스트, 무성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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